친일파 對 전쟁영웅 '김백일 동상' 철거논란 재점화
친일파 對 전쟁영웅 '김백일 동상' 철거논란 재점화
  • 조형록 기자
  • 승인 2018.10.23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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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단체·김치five "역사와 사실에 대한 검증 필요"
시민단체 회원들이 김백일 동상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

【거제인터넷방송】조형록 기자= 거제지역 시민단체들이 간도특설대의 장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김백일 동상' 철거를 촉구했다. 

친일김백일동상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23일 오전 11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상 철거를 강력히 요구했다. 

대책위는 기자회견에서 "김백일 중장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독립군을 학살한 간도특설대의 장교를 지낸 친일파"라고 밝혔다. 

또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친일파인 김백일 장군의 동상이 거제시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화해와 평화를 위한 교육현장인 포로수용소에 있을 필요가 없다"며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 역사를 바로 세우기 해서라도 반드시 철거해야 할 적폐"라고 덧붙였다. 

대책위는 거제시가 지난 2011년 5월 문화재영향검토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불법적으로 동상설립 허가를 내준 게 근본적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6·25전쟁영웅이라는 사실만 알고, 친일파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변명은 가당치 않다고 강조했다. 

거제시는 2014년 '동상철거 명령 및 행정대집행' 절차를 진행했지만 (사)흥남철수기념사업회가 취소소송을 벌여 대법원에서 패소하면서 동상을 철거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대책위는 "소송 결과가 거제시의 잘못된 행정 행위에 대한 판단일 뿐 역사적 판단은 아니라고 규정했다. 거제시가 철거 소송에서 졌다고 김백일 장군의 친일행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백일 장군의 친일행적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동상은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내년 3·1운동 전까지 동상 철거', '친일동상 불법 설치와 존치 상황에 대한 거제시장의 공식사과', '거제시의회의 동상 불법 설치과정 조사와 철거를 위한 역량 집중', '거제시와 거제시의회 대책위가 함께하는 협의기구 구성'을 요구했다.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굳은 의지도 나타냈다. 

동상에 욱일기를 두르려는 시민단체 회원과 해병전우회 회원이 충돌했다.

김백일 장군은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

대책위가 강력히 동상 철거를 요구하자 보훈단체 관계자와 김치 five 이경필씨는 다른 입장을 표했다. 

보훈단체 관계자는 "김백일 장군에 대한 평가가 전쟁영웅과 친일파로 나뉘고 있다"며 "서로 간에 입장차가 있겠지만 대화와 화합을 통해 좀 더 나은 방법을 찾는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흥남철수작전때 매러디스빅토리 호에서 태어난 김치 five 이경필씨는 "김백일 장군의 아버지가 독립투사였고, 김백일 장군이 만주로 넘어가게 된 계기가 일제가 패망할 것을 예상한 부친이 국방부를 만들기 위한 군대 체제를 배우게 하기 위해 보냈으며 이명박 정부때 만들어진 친일백서에 김장군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지만 이에대해 당시 국방부에서 내용을 해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보훈단체와 김치five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을 거친후 동상철거에 대해 논의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 앞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김백일 장군 동상'에 친일파라며 욱일승천기을 두르자 해병전우회 회원이 반발하고 나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김백일은 누구 

본명이 김찬규(金燦奎)였으나 해방 후 김백일로 개명했다. 1917년 1월 30일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서 1951년 3월 28일 6·25전쟁 당시 지휘관으로 활동하던 중 뜻하지 않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17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서 1935년 보성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만주국에서 장교를 양성하는 봉천군관학교의 5기 군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지린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제1구대에 배치되어 1937년 9월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그 해 12월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되어 제3군관구 예하 보병 제15단에 배속됐다.

1938년 12월 무렵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과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젠다오와 러허 일대에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해 일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특수부대로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토벌작전을 모두 108차례 벌였다. 1939년 12월부터 주로 젠다오성에서 조직을 강화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했다. 1941년 3월 보병중위로 진급했다. 
일제침략에 적극 협력한 공로로 1943년 9월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5위 경운장을 받았다. 1944년 1월 15일 부대원들과 함께 러허성으로 옮겨 팔로군 토벌작전을 수행했고 3월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하여 제1련(중대) 연장(중대장)이 되었다. 1945년 1월부터 간도특설대가 만주국 허베이성 기동지구에 주둔해 팔로군과 민간인을 상대로 한 치안숙정 공작을 펼쳤다. 8월 20일이 되어서야 팔로군으로부터 일제가 항복했다는 사실을 듣고 예하 부대원들과 함께 진저우로 이동해 8월 26일 부대 해체식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1945년 12월 간도특설대 동료인 최남근, 백선엽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하면서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도 홀로 반공에 입각해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김백일이라고 개명했다.

1946년 2월 육군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하였고, 국방경비대 제3연대 창설 중대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제3연대장,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특별부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19일 국군 제5여단을 이끌고 현지 사령관으로 여순·순천사건을 진압하고 1949년 옹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옹진반도 전투를 지휘했다. 육군보병학교 교장과 제3사단장을 거쳐 1950년 4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임명됐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소장 김홍일의 뒤를 이어 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장을 맡았다. 그 해 9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휘하의 1군단이 10월 1일 맨 먼저 38선을 돌파해서 원산과 청진을 지나 혜산진까지 북상했다. 대한민국에서 이 날을 기려 ‘국군의 날’로 제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해 10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됐다. 
중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를 물리치고 흥남철수 작전에서 10만명의 민간인을 해상수송을 통해 구출했다. 1951년 3월 28일 제8군사령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군단본부로 급거 귀대하기 위해 악천후를 무릅쓰고 비행기에 올랐다가 대관령 인근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66년 10월 서울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출처/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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