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문화유적]없어질 뻔한 장목진객사(長木鎭 客舍)
[거제의 문화유적]없어질 뻔한 장목진객사(長木鎭 客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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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0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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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향토사학자

【거제인터넷방송】= 

허물어지기 직전의 장목진 객사
허물어지기 직전의 장목진 객사ⓒ이승철

장목은 거제도의 북단에 위치한 해안 변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부산, 진해, 마산 항과 인접해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내륙의 문화가 부산, 김해, 진해, 마산 창원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기후가 온화하고 해안 변 산록의 토질이 대체로 비옥하여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살았다. 자연적인 어패류와 풍부한 고기, 그리고 산야초를 식량으로 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수도 패총(貝塚)을 비롯하여 거가대교 진입도로 부지 내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주거지, 분묘 등에서 출토된 돌칼, 무문토기, 옥구슬 등 다양한 유물은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들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간곡 마을 분묘 17호분에서 출토된 청동합(靑銅盒)과 청동시저(靑銅匙箸), 간곡 2호분에서 출토된 옥구슬은 귀족사회의 유물로 군장(君長)이나 부족장의 묘로 인정된다. 이런 유물은 당시 막강한 권력층이 장목지역에 존재 하였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장목지역에 부족사회 형태의 집단적인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증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은 지금까지 장목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좋은 증거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축성한 영등성을 비롯하여, 임진란 때 일본 군대가 축성한 왜성(倭城)과 장목진 객사 등은 많은 왜침을 당했던 고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특히 장목지역은 임진란 당시 서해의 관문으로 교두 부 역할을 하였고, 러일전쟁 당시는 일본 해군의 가근거지(假根據地)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장목지역의 문화유산은 거제를 대표 하는 유적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가, 임진왜란과 장목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군들은 그날로 동래성을 함락하고 천성가덕과 거제도를 침범 하게 된다.

장목은 부산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칩임을 당했다. 장목 구영에 영등성(永登城)의 진이 있었고, 장목 동쪽에 율천성(栗川城)의 진이 있었다. 그 두 진도 4월 중순경에 왜적에게 빼앗겼다.

전초기지였던 영등성과 율포성이 왜적에게 함락 당하자 거제도에 상육 한 왜군들은 창목 하청을 경유 고현 성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그런 위험한 사항에서,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진주진관(晋州鎭管)의 연락을 받고 고현성주 김준민 현령은 부하들을 데리고 진주성 방어에 나가고, 고현성은 의병장들이 모여서 방어를 하다가 왜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5월 14일 경상우수영 이영남(李英男)장군으로부터 구원병을 요청받고 5월7일 옥포대첩을 처음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에 머물면서 작전지휘를 하게 된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장문포에서 지휘를 하게 된다. 아래 선조실록이 그 자료다.

1)선조 82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1월 5일(정유) 4번 째 기사

비변사가 장문포와 한산도를 지키는 일에 대해 아뢰다

2) 선조실록 > 선조 29년(1596년) > 선조 29년 11월 > 선조 29년 11월 7일

“이원익(李元翼)이 이제 남방으로 내려가려 하니, 아무쪼록 백성들을 불러 모아 한산도(閑山島)·장문포(長門浦)를 충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거제(巨濟)를 지키지 못하면, 다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선조 82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1월 9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이므로 원균을 절제(節制)할 것인데, 원균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감수하지 못하여 두 장수가 화합되지 않을 것이니, 일이 성공될 리가 없을 듯하다.’ 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통제사란 직임은 한때의 필요에서 생긴 것이어서 그대로 둘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으므로, 이순신의 통제사라는 직명도 오히려 낮출 수 있고 혹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라 칭하여 이순신과 명위(名位)가 대등하게 할 수도 있으니, 신축자재하게 임의로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는 대개 원균의 자급(資級)이 본디 이순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감히 다시 아뢰어 번거롭게 하는 혐의를 피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신은 지난번 또 한산(閑山)의 주사(舟師)를 빨리 거제(巨濟)의 장문포(場門浦)3591) 에 진주하게 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제는 적이 와서 침범할 형상이 이미 드러나 눈앞에 닥친 일이라 매우 급박하므로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죄다 거제에 진주하여 수로(水路)를 제압하고 있다가 책사(冊使)가 나온 뒤에는 모든 오가는 적의 배를 곧 주사로 막아서 잡아 죽임으로써 적이 오는 길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속히 하서(下書)하여 이순신 등이 급히 진주하도록 엄히 신칙(申勑)하여 다른 말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소서.

[註 3591]장문포(場門浦) : 장문포(長門浦)

[註 3592]선봉(選鋒) : 정예한 군사

이용현 문화재 전문위원과 필자가 자료 조사를 할 때 객사 기와장에서 康熙 五年년이란 글자가 발견되었다. 이 글자로 미루어 볼 때 이 건물은 임진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나, 장목진객사(長木鎭客舍)현황

○ 소 재 지 : 장목면 장목리 219-18번지

○ 규 격 : 건평 18.7평(61.85㎡), 대지 820㎡

○ 수 량 : 1동

○ 구조 또는 형태 : 목조와가

○ 소 유 자 : 거제시장

○ 관리단체 : 거제시장

○ 지정 연월일 : 1979. 12. 29

○ 연혁(유래)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장목진 객사는 조선시대(朝鮮時代) 거제부(巨濟府) 소속의 7진보(鎭堡) 중의 하나였던 장목포진(長木浦鎭)의 관아(官衙) 건물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임진년에 동구에 건립하였던 것을 서구로 옮겼다고 하며, 선조25년(1592) 정월 장목 별진장이 진영의 객사로 건립하여 평화축원의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복원을 마친 장목진 객사ⓒ이승철
복원을 마친 장목진 객사ⓒ이승철

현재의 객사는 정조9년(1785) 당시 별장(別將)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있던 이진국(李瑨國)이 중건 한 것을 순조 2년(1802)에 다시 중수하였다. 1914년 3월부터 장목면사무소로 활용하다가 1953년 장목면 사무소가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서구마을노인정으로 활용해 왔다.

1978년 폭풍우에 지붕 일부가 붕괴되어 퇴락직전에 있던 것을 서구 마을에서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을, 장목 해동병원 김종석 원장을 만나 복원대책을 논의 하여, 김종석 원장이 지역 주민들을 모와 놓고, 장목진 객사 복원대책위원회(위원장 김종석 : 해동병원장)를 조직하여 동아대학교 박물관 이용현(李容玹)과장과 함께 내가 자료조사를 하여 지방문화재로 긴급 지정을 하게되었다. 이 때, 추진위원장 김종석은 자료조사 및 경비 등을 자비(自費)로 부담하였다.

이 건물은 양측에 툇마루를 갖춘 방을 1칸씩 두고,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둔 객사의 일반적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다. 높이가 1m가 넘는 막돌 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세워져 권위적인 입면을 보여 주며 외각의 기둥은 배흘림 두리기둥을 하고, 내부는 각주를 세워 입면의 위엄과 내부공간의 실용성을 동시에 취하고 있다.

또한 주두(株頭)아래 초익공(初翼工)을 두었다는 점도 공공건물로서의 정직성을 보여 준다. 구조는 내부에 높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도리 다섯 개로 지붕을 받치는 무고주(無高株) 오량(五梁)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 기와지붕으로서 전면에만 부연(附椽)을 두어 겹처마를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1) 거제시지에 조선 초기의 국방체재를 보면, 고구려시대의 중익(中翼), 좌익(左翼), 우익(右翼)으로 북방지역의 군익도(軍翼道)체제와 연해안의 영(營)과 진(鎭)이라는 남방지역의 진관체제(鎭管體制)란 것이 있었다.

2) 거제시지 진관체제의 특성은 중요한 군사기지를 거진(巨鎭)이라 하여 군사에 쓰일 거점(據點)으로 삼아 그 주위의 마을을 소속시켜 지휘한다는 것이다.

3) 거제시지 수군(水軍)도 진관체제에 따라서 국방임무를 수행 하였지만 내륙의 육군과는 달랐다. 그것은 행정 단위인 도(道)를 기준으로 수영(水營)을 설치하고 수사(水使)가 최고 책임자다. 그 관할 해안 포구에 포진(鋪鎭)또는 첨절제사(僉節制使=僉使)와 만호(萬戶)가 있었다.

다. 객사상량문(客舍上樑文) 원문(原文)

도괴 직전에 있던 건물을 하루속히 복원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 당시 거제군과 경남도의 예산으로는 부족하여, 내가 출장을 내어 문화재 관리국에 가서 거제면 출신 이한홍 기획관의 도움으로 국비 예산을 급히 확보 하여 긴급 보수를 하게 되었다.

1981년 11월 6일 장목진 객사를 해체(解體) 할 때 대들보 중간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오래되어 식별이 어려운 글자가 있었다.

御宇上樑

奧昔 壬辰地歲 相宅建宇 丁酉乙卯 地又不安

創設鎭陳 地理不吉 御宇且頽

옛날 임진년에 진을 창설 했으나 집 자리가 좋지 않아 정유년 이월 달에 다시 터를 잡아 집을 세웠으나 어우는 또 무너졌다.

今玆 更擇吉地移建 巽坐乾向之原

이제 다시 좋은 길지를 잡아 옮겨 세운 집이 손좌건향이다.

築哉 天地始所東方爲首人世之間國君最上

천지가 처음 시작 될 때는 동방이 머리요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국왕이 최상이다.

蓋建國之莫過愛御宇之宏麗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데 막중한 것은 이 집이 화려하고 웅장한데 있다.

伏以獻誠玉殿更修華明

업드려 정성을 다해서 옥전을 다시 수축한다.

飛0雕樑貫於靑天之中三光逼今

層楹0謝洗於碧海之頭五龍於膝

춘세밑에 기둥과 보는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산광이 빛나도다. 기둥은 푸른 바다에 머리를 씻고 다섯 마리용이 무릅 아래 있도다.

宅神有步瀛州之岳天一園邊淸音觀

形局疑憑廣漢之殿雲干點外奇妙節

택신들이 뜰을 걷는 모습은 마치 영주산 신령과 같고 하늘에는 푸른 정원과 아름다운 소리가 장관이다. 형국은 한나라의 광한루 같고 구름은 점점이 괴괴 절묘하다

衆鷺歸江之聲國泰民安0歌聲高

萬峀矗大之色烟0看逢島之雲歸

萬民擊000000000000

백로들은 강가로 돌아오고 백성들의 태평가는 높이 들린다.

높은 산 우거진 곳에 연기가 섬 자락에 구름인 듯 보인다.

淸溪叩琴靑彈琶花發玉泉竹0雲烟月芳稀世之名區

맑은 계천에서 거문고 타고 비파를 탄다. 꽃도 피었는데 옥같이 솟은 샘물과 달그림자에 비친 대나무 그늘도 세상에 드물고 구별키 어렵다

味佳解楹下紛船淸襟爽風前古寺

또 아름다운 것은 난간아래 뱃머리를 끓으니 상쾌하고 맑은 공기는 옛 절 맛이나 같다.

景勝於岳陽之樓望北天而通月川0

爽通於醉翁之亭倚西琅而應納仰方

御我堂上烈士竝出 捅氣0英雄雲集

경치를 말하자면 중국 악양루보다 낫고, 상쾌할 것을 생각하면 술에 취한 첨지의 집이로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 달은 은하수를 지나가고 서쪽을 지내다 보니 동방이 감응하도다.

中略

乾隆五十年乙巳孟春記

行別將禦侮將軍李瑨國

객사 상량문에 보면, 임진년에 진을 창설 하여 객사를 건립하였는데 자리가 좋지 못해서 정유년에 다시 옮겨 자리를 정하였으나 또 자리가 좋지 못하여 객사가 무너졌다. 그래서 이제 1785년 다시 좋은 자리에 이건 하였다. 그 방향은 손좌건향이다.

중략

건융50년 을사(1785) 봄에 행 별장 어모장군 이진국이 건립 하였다고 한다.

위의 조선신록과 객사에 내용과 상량문 내용을 보면, 임진년이 어느 시대인지? 임진년에 객사를 짓는데 자리가 좋지 못해서 정유년에 다시 자리를 옮겼는데 또 그 자리가 좋지 못하여 무너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임진년은 어느 때이며, 정유년은 어느 때 인지? 전해져 오는 말에 의하면, 임진란이 나던 그 해와 정유재란이 있었던 해 였 다고 한다.

 

○ 관리상황

1981.11. 6 ~ 1982. 1.25 : 1차 공사(장목진객사 해체) 18,187천원

1982. 5.23 ~ 8.19 : 2차 공사(장목진객사 복원) 29,580천원

1982.12.21 ~ 1988. 6.20 : 3차 공사(삽문·협문 안내판 초가철거), 6,690천원(군비)

라. 복원상량문(復元上樑文)

長木은 원래 長門浦라 稱하여 앞은 鎭海灣에 臨하고 祭釋峰이 聳立하여 고요하고 기다란 푸른 바다 長木灣을 이루니 四方 地形이 調和되여 巨濟 北端의 要塞地이다. 일찍이 壬辰倭患의 機微가 있을 때 이곳에 別鎭을 設置하였고, 亂後의 當分間 荒廢하였으나 다시 陣營이 復舊되었으며 官衙가 整備되어 客舍建物도 時宜를 따라 마련된다. 舊上樑文에 乙卯 移建設과 瓦當 康熙 五年, 康熙 五十年 銘等이 보임은 이를 立證하는 것이라 하겠다. 現在 客舍建物은 乾隆 五十年 乙巳 正祖 五年 西紀1785년 正月 二十日 申時에 이곳 巽坐乾向으로 移建하였는데 當時의 主幹者 行別將 禦侮將軍 李珍國임도 舊上樑文에 傳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庚戌國恥後 西紀1914年 甲寅부터는 本客舍는 部落民에 그 管理를 委任하였다. 年年歲深한 古建物은 날로 頹落하여 가는데 部落民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한갖 懷古의 情과 復元의 뜻을 품은 채 袖手傍觀할 수 밖에 없는 實情이었다. 西紀1971年 3月 部落代表인 金德允, 鄭南植은 面長 金顯沂에게 補修를 建議하였던 바 金面長은 이 事實을 卽時 上級 官廳에 要請하였으나 豫算事情으로 遲延되어 오던 중 海東病院 金鍾石院長이 文化財的 價値가 있음을 認定하고 이를 慶尙南道 文化財保護廳인 東亞大學校 博物館에 調査를 依賴한 結果로 西紀1980년 1月 14日 慶尙南道文化財委員會에서 地方有形文化財 第189號로 指定되었던 同年 9月 5日附로 文公部에서 道知事에게 補修指示가 下達되었다는 通報를 接하였다.

西紀1981年 11月 2日 巨濟郡廳에서 工事入札이 있었고 同 8日 着工, 同年 12月 8日 午前 10時 盛大한 上樑式을 擧行하게 되었다. 長木面 壹萬二千 面民은 本客舍 復元을 위하여 誠心誠意 努力하였으며 東亞大學校 總長 鄭樹鳳博土, 同 博物館長 丁仲煥博士, 同 敎授 金東浩 先生, 文化財委員 李容玹先生, 同 出版部 朴善福先生, 巨濟郡 公報室 李承哲諸位께서는 本鎭 客舍 復元에 絶對的으로 협조해 주신 誠意에 對하여 感謝의 禮를 드리는 바입니다.

上樑 後에는 地靈에 監護하시고 海龍歸德하시여 길이 保存되시기 祈願하는 바입니다.

上樑日時 西紀 1981年 辛酉 12月 8日 午前 10時 上樑

東亞大學校 總長 鄭 樹 鳳

慶尙南道知事 崔 鍾 鎬 해석

慶南文化財委員會 委員長 丁 仲 煥

慶南文化財委員會 委員 李 容 玹

東亞大學校 敎授 金 東 鎬

巨濟郡守 李 奉 牧

巨濟郡公報室長 金 章 旭

長木面長 朴 錫 燁

長 木 面 文化財復元推進委員會 委員

委 員 長 金 鐘 碩

副委員長 徐 斗 元

副委員長 孔 良 萬

總務幹事 金 顯 沂

技術監督 鄭 相 澈

工事請負會社 大邱東伸建設株式會社

現場監督 金 相 琪

都 木 手 崔 全 甲

木 手 劉 鉉 淳

마. 선조신록의 기록문.

장목포진은 거제부의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효종7년(1656)병신년에 통제사 유혁연이 장계를 올려 장목포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별진장은 무종 九품이고, 군관 8인, 진무9명, 지인 6명, 사령6명, 전선 한선기비관 5인,도훈도 1인, 좌우포도 2인, 사부18명, 화포수 10명, 포수 24명, 타념정수3명, 능조군 120명, 병선 선장1인,사부10명, 포수10명,타공1명, 능노군 14명, 일하후선 사공 1명, 능노군 4명, 이하후선 사공 1명, 능노군 4명, 요망은 없다. 순영미 583석4두5서8합4석, 콩299석6두5서3합2석, 조199석6두6합, 피모 158석1두6서7합5석, 통영미(통제영 소속)122석5서9합7석, 콩5석4두9합,2석, 조 64석7두3서1합1석, 피모 45석5두3합, 청도미 8석3두3서3합3석, 조31석12두6서4합, 밤15석11두9서, 피모 42석10두3합9석 대변미 14석5두, 찐쌀 3석, 미식 2석

* 合홉, 夕작

 

4)「長木浦鎭 在府北六十里無城 孝宗七年丙申 統制使柳赫然狀聞建置 別將武從九品 軍官八人鎭撫九名知印六名使令六名 戰船 翰船旗牌官五人都訓導一人左右捕盜二人射夫十八名火砲手十名砲手二十四名舵拈碇手三名能櫓軍一百二十名 兵船 船將一人射夫十名砲手十名舵工一名能櫓軍十四名 一伺候船 舵工一名能櫓軍四名 二伺候船 舵工一名能櫓軍四名 瞭望 無 巡營米 五百八十三石十四斗五棲八合四夕 太 二百九十九石六斗五棲三合二夕 租 一百九十九石六斗六合 皮牟 一百五十八石一斗六棲七合五夕 統營米 一百三十二石五棲九合七夕 太 五石四斗九合二夕 租 六十四石七斗三棲一合一夕 皮牟 四十石五斗三合 淸道米 八石三斗三棲三合三夕 租 三十一石十二斗六棲四合 栗 十五石十一斗九棲 皮牟 四十二石十斗三合九夕 待變米 十四石五斗 蒸米 三石 味食 二石」

바. 역사적인 기록

장목진 객사 상량문에 奧昔 壬辰年이란 기록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볼 때는 옛날 임진년이다. 그 임진년이 1592년 임진년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이 거제북방의 요세지다. 영등성과 율포에 성이 있었다면 장목항은 內海를 방어 하는데 가장 좋은 지리적인 여건을 갖고 있다.

오래전부터 지역민의 口傳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말은 임진년 때 東區에 건립 하였는데, 여러 번 무너져서 새로 다시 세웠는데 또 무너져서 그 자리가 지리적으로, 陰陽五行적인 地理風水가 좋지 못하여 세울 때 마다 무너져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傳言되고 있다. 御宇란, 임금이 들렸던 곳이나, 중요한 방어 진지를 어우라 하였다. 장목의 어우는 장목진이 생기기 전에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집이다. 그 집을 중심으로 하여 방어진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처음에는 웅장한 기와집이 아닐 수도 있다.

정유재란 때의 기사를 보면,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치보(馳報)에 ‘10일은 일기가 온화했다. 저와 통제사(統制使)·경상 우수사가 일시에 전선(戰船) 63척을 거느리고 해뜰 무렵에 장문포(長門浦)에서 배를 띄워 미시(未時)에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니 왜적이 창황히 수선떨며 병력 3백여 명을 내어 저항하려고 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수군(水軍)이 절영도(絶影島)로 후퇴하여 정박하자 왜적들도 저희들 진으로 도로 들어갔다. 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들은 장문포가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장목진객사가 있었던 양쪽 산에 임진란이 일어난 그 다음해부터 왜적들이 성을 축성 하였다. 그때 장목진은 적의 손에 들어가서 방어진지로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정유재란이 끝난 이후부터 장문포에 우리해군이 자주 들락거린 것을 보면 이지역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 하게 한다.

장목진객사의 설립연대에 대한 확정은 이후 다시 좋은 자료가 발견되기 전에는 1777년의 임진년,1712년의 임진년, 1652년 임진년,1592년의 임진년인지 확정을 짓기는 어렵다.

그러하나 장목진객사가 방어진지 역할을 한 중요한 어우(御宇)의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1979년 폭우로 한쪽 처마가 무너져 있었던 것을, 별첨 사진처럼 없어지기 직전에 있었던 것을 필자가 문화재를 담당 하면서, 이 건물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보존 하기위해, 김종석 해동 병원 원장과 동아대학 이용현, 교수, 이굉지 경남도 사무관에게 협조를 요청 하여 문화재로 지정하고 문화재 관리국 이한홍 기획관의 국비 지원으로 없어 질 번 한 장목진 어우를 복원 보수 하게 되었다.

장목진 어우는 일본과 가까운 방어 진지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장목진 객사 준공식ⓒ이승철
장목진 객사 준공식ⓒ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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