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광 거제타임즈 편집인
오늘 아침 한 여자로 부터 받은 '똥세례를 안기고 말겠다'는 폭언성 첫 전화로 하루를 시작한 탓인지 종일 마음이 무겁고 깨운치 못하고 언잖다. 그 여자의 전화 내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역언론에 종사한다는 것이 결코 화려하지도, 재물을 모아 가족들로 부터 가장노릇을 제대로 한다는 평가도 받지 못하는 존재이건만 '저널리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괜히 죄인인냥 남 앞에 나서기가 주저스럽다.

며칠 전에는 이 여인의 남편되는 사람의 폭언이 있었기에 더 그렇다. "검찰청 앞이다. 고발할 것이다. 돈이 얼마가 들어가더라도 결코 그만 두지 않겠다"는 거의 협박성에 가까운 말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 내가 그렇게 못할 기사를 쓰는 기자이지는 않은가? 나의 그림자를 다시금 되돌아 본다.

최근들어 이런 전화를 자주 접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실리면 그 사실에 대한 진실된 해명이나 반론요구 보다는 오히려 협박성에 가까운 폭언으로 전화질을 한다. 얼굴을 보지않고 하는 전화라는 방패막이 있기 때문인거 같다. 물론 그런다고 내가 크게 달라 질 것은 없지만 그저 우울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이 절대로 내가 동의하거나 받아들 일 수 없는 사실에 기초했지만 어쩐지 내가 못할 짓을 한 죄인인듯 하다.

"전임 시장 최측근 인사의 거제시도시계획 변경사건과 관련한 항변' 이어서 가능한 인간적으로 이해를 하면서 노여움을 달래고 싶지만 그들과 '저널리즘의 본질이 어떻고, 도덕적으로 크게 흠결이 있는 존재는 윤리적 약자로 설땅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등의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서 "하고픈 뜻대로 하라'는 대답으로 결론 지어야만 하는 탓에 안타까움이 더 하다.

이렇게 궂은 일, 즐거운 일, 슬픈 일들 속에 거제에서 제일 처음 인터넷신문으로 출발한지가 벌써 만 8년이 지났다. 그러면서도 항상 머릿 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이 '지역에서 언론매체를 운영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사실로, 마치 소화하지 못해 채한 음식물 처럼 속에다 안고 산다. 거제신문 사장을 시작으로 중앙신문 사장을 거쳐 17년 세월 동안 남은 것은 상처 뿐이고, 잃어버린 재물, 흠집난 명예 뿐인데 이제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하고 가끔 내 육십성상을 반추해 보기도 한다.

신문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같다고 하듯이 지역신문의 수준은 거제시민의 수준과 비례한다. 따라서 앞으로 거제시민수준이 높아지면 신문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지만 저널리즘의 정도(正道)를 지키는 신문이 정말 얼마일 것이며, 그에 따라 시민 수준도 높아질 것이나 그에 희생해 온 사람들은 시민들에게얼마나 기억될까?

일부 재력가들이 점령한 신문,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기사를 남발하는 신문이 있다면 신문의 존재 가치는 떨어 질 것이다. 신문 기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신문 존재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현실까지 초래하게되면 더 심각한 문제도 생긴다 그리고 종이신문과 일반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적 차이가 별로 없다는 평가가 그리 과도하지 않은 세상이 됐지만 언론계 종사자들 조차 확고한 사명감이 없다면 희망이 없어진다.

그럼 우리는? 나는 어떤가? 고개를 흔든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각오를 하면서도 꼭 이런 불쾌한 전화질을 접하면 나 또한 보통 사람일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절감케 한다. 지역신문의 성패는 시장주의 관점에서 경쟁력 없는 상품의 소멸에 불과하겠지만, 민주주의 관점에선 중요한 여론매체의 소멸일 수도 있다. 신문은 분명히 다른 매체와 달리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여론 전달매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제대로된 지역신문의 소멸은 사회적 손실이 된다. 이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도 전환되어야 할 시점이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기사의 객관성, 공정성, 정확성에 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확인된 사실을 일반 대중을 위해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정확하지 않고 특정 집단이나 특정 사상에 편향된 기사는 저널리즘의 본질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신문기사는 권력자나 광고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해,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 저널리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여건은 이를 채우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신문의 존재가치는 결국 신문이 저널리즘의 본질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된다. "혁명의 불길과도 같은 뉴미디어의 변화 속에서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 기자 정신"임을 다시 생각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양심지이자 '신문의 신문'으로 평가받는 뉴욕타임스도 인종주의 편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법기관이 ‘법과 질서’의 눈으로 ‘사건’을 다룰 때, 기자는 ‘인간과 정의’의 눈으로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기사를 길어 올려야 하기에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권력자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시민사회의 대표를 ‘자임’한 기자는 시민의 눈으로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감시하고, 기사로 폭로하여 경종을 울리는 것이 사명이다.

고급정보가 오가는 길목인 권력기관은 비밀스런 문서와 음험한 이야기들이 횡행해 기자들은 묻혀진 진실을 캐낸다는 의미로 언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날 서린 비판의 눈으로 권력자들을 감시한다. 시민의 눈으로, 시민들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권력을 향해 따져 묻는 탐사·기획·심층 보도는 원래 기자들의 몫이다. 그런 과정에 취재 보도된 것이 독봉산 웰빙공원의 도시계획도로건이고, 계룡중학교 뒷편 도시계획도로 취소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를 '돈으로 죽이겠다', '똥을 퍼부어 망신을 주겠다'는 폭언은 언어의 유희를 넘어 폭력이며 지역사회에 대한 도전이지만 이것이 보편화 되는 현실이 그저 씁쓸하다. <글/ 박춘광/거제타임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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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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