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성진 변호사
‘피고인은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위협하는 반국가 단체인 북한의 대남혁명론을 따르는 지하혁명조직 RO의 총책으로서, 조직원들을 상대로 내란을 선동하고, 주도적으로 내란을 음모하였으며, 다량의 이적표현물을 주거지 및 의원회관 사무실에 보관하였다. 이에 더하여 피고인이 2003년 국가보안법위반(반국가단체구성)죄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 받은 전력이 있고, 특별사면과 복권을 통해 대한민국과 우리사회가 두 차례에 걸쳐 관용을 베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성하기는커녕 다시 본 건 범행에 나아간 점까지 종합해 보면, 피고인에게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 피고인을 징역 12년 및 자격정지 10년에 처한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사건 1심 판결문(수원지방법원 2013고합 620호) 결론부분이다. 판결문의 길이만 A4 용지 467페이지이다. 이렇게 긴 판결문을 여태 본적이 없다. 아마 수사기록 및 공판기록은 수십만 페이지에 이를 것이다. 가히 살인적으로 방대한 기록을 모두 소화해 낸 담당 재판부의 노고에 경의(敬意)를 표한다. 이 사건은 헌정사상 보기 드문 현직 국회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사건으로 대법원까지 갈 것이 확실하고, 이 판결이 현재 진행 중인 헌법재판소의 통진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둔 재판부의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오·탈자 한자 보이지 않는다. 법리를 엄격하게 적용, 피고인 이석기에 대한 일부 국가보안법위반(찬양·고무)의 점에 대하여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추상(秋霜)같은 판결문의 행간에 재판부의 결연함과 고뇌가 묻어난다.

이 사건은 2010년 5월 한 RO 조직원(A)의 제보로 내사가 시작되었다. A는 제보 후 국정원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고도의 수사기술을 동원하지 못하고 증거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직접 증거를 확보하여 수사에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국정원 직원(B)에게 자신이 상부조직원과의 대화를 녹음하겠다며 녹음기를 구해달라고 요청, B로부터 녹음기를 건네받아 녹음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이때부터 본격 내사에 착수, 2013년 5월 10일 및 5월 12일에 걸친 약 130명정도의 RO 조직원의 비밀 모임을 녹취하는 데 성공, 이를 근거로 2013년 8월 28일 본격 압수수색을 실시함으로써 공개수사에 들어간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새삼 국가정보원의 역할과 존재근거에 대해 생각해본다. ①한 사건을 두고 3 년 이상의 장기 내사를 했다는 점, ②그러고도 수사보안이 유지되었고 그럴 정도의 인적·물적 장치를 갖추었다는 점, ③이정희 통진당 대표를 필두로 민변의 전문변호사가 본건 수사의 각종 소송법적·실체법적 문제점 수 십 가지를 예리하게 지적했음에도 이를 모두 극복하고 법원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아낼 정도로 충실히 내사 및 수사를 해왔다는 점, ④특히 녹음화일의 경우 적법한 증거로 인정받기 위하여 요구되는 통신비밀보호법상의 엄격한 절차와 이를 보존 관리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고도의 기술적 장치와 조치를 거의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점에서 본 건은 가히 경찰·검찰 등 일반 수사기관이 아닌 국정원만의 노하우와 경쟁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과연 국정원이 「자유와 진리를 위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슬로건에 맞는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건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한마디로 국정원의 존재근거를 웅변해준 쾌거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국정원은 현재 사상 최악의 위기상황에 처해있다. 이른 바 ‘서울시공무원 간첩 증거조작사건’이다. 이 사건은 탈북자 출신 서울시공무원 유우성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탈북자들의 신원을 북에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국가보안법상 간첩죄 등으로 구속 기소되었으나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현재 항소심 계속 중인데 그 과정에서 국정원이 조작된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였다는 것이다. 유우성이 실제로 간첩인지는 별문제다. 문제는 국정원이 돈을 주고 간첩죄의 증거를 조작, 항소심 법원에 제출한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보안법은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이 법의 죄에 대하여 무고 또는 위증을 하거나 증거를 날조·인멸·은닉한 자는 그 각조에 정한 형에 처한다’고 규정(제12조① 무고·날조)하고 있다. 가히 가공(可恐)할 법조문이다. 간첩죄의 증거를 조작하면 간첩죄와 같은 형인 최고 사형까지 처한다는 것이다. 권력이 왜 양날의 칼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사건 1심 판결문(서울중앙지방법원 2013고합 186호)을 보면 국정원이 1심소송과정에서 이미 증거를 조작한 흔적이 엿보인다. 당초 검찰은 ‘피고인이 2012년 1월 22일 북한 보위부공작원 신분으로 북한지역으로 탈출, 회령시 보위부 사무실을 방문하여 탈북자 신원정보 수집 등 추가지령을 수수하고 같은 달 24일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혐의(국가보안법상 특수잠입·탈출 등-유우성에 대한 공소사실 중 일부임)로 기소하였고 그 증거로서 국정원이 확보한 피고인이 1월 23일 북한회령에서 촬영하였다는 흑백 사진 1장을 증거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1심 법원은 위 사진이 북한 회령이 아닌 중국 연길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①이 사진이 같은 날 촬영한 다른 사진 3장과 함께 같은 노트북에 칼러로 저장되어 있었고, ②다른 사진은 노래방 등에서 촬영된 것으로 배경으로 보아 북한이 아님을 한눈으로 알 수 있었으며, ③사진을 촬영한 아이폰은 자동으로 GPS 위치정보가 저장되어 지도상으로 촬영장소가 북한이 아닌 중국임이 쉽게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증거 확보에 급급한 국정원이 ‘압수한 노트북 같은 폴더에 저장되어 있는 칼러사진 4장이 모두 같은 날 중국에서 촬영된 것을 알면서도 마치 피고인이 북한에 잠입하여 촬영한 것처럼 법원을 속이기 위하여 그중 배경이 없는 사진 1장만 추려 이것을 흑백으로 프린트하여 제출한 것’이라는 의심을 들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문제되고 있는 항소심증거인 피고인의 출·입경기록 조차도 위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실제로 이런 사실이 밝혀지고 국정원 책임자가 간첩죄와 같은 죄로 처벌을 받게 된다면 국정원은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워서야 되겠는가. 이 사건은 국정원에 대한 보다 엄격한 관리감독체계를 마련할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과 그 시급성을 웅변하고 있다. 나아가 ‘아무리 민주화된 사회라도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는 한시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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