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 16일은 통영의 착량묘鑿梁廟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기신제忌辰祭가 모셔진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께서 노량 앞바다에서 순국하신 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다. 기신제의 제주는 대한민국 해군장병들이고 착량묘를 관리하고 있는 통영충렬사(이사장 박형균)에서 .후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은 여러 군데 있지만 가장 먼저 위패를 봉안하고 제를 지낸 곳이 바로 착량묘이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이 지방 사람들이 착량지가 내려 다 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를 짓고 돌아가신지 이듬해부터 정성껏 제사를 모셔왔다. 나라보다도 먼저 통영의 백성들이 장군의 충절과 위업을 기린 것이다. 착량鑿梁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라는 의미로 당포해전에서 참패한 왜군들이 쫓기다가 협곡에 이르러 돌을 파서 다리를 만들며 달아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포해전은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연합함대가 경상남도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1592년(선조 25) 6월 2일의 해전이다. 당시의 난중일기를 보면 5월 29일에 사천(현,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서 적과 조우하여 적선 13척을 불태우는 승리를 하고 장군은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관통을 당하는 상처를 입는다. 처음에는 가볍게 보다가 늘 농이 흐르는 고질이 되어 괴로워하신다.

6월 초1일. 기해. 맑음. 사량蛇梁 뒷 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6월 초2일. 경자.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당포唐浦에 이르니, 적선 20여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우리배가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 판옥선만 하였다. 배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그 누각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끄떡도 안하였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이 마구 쏘아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들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모조리 섬멸하여 하나도 남겨두지 않앗다. 얼마 후 왜선 20여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에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介島로 들어갔다.

사량蛇梁은 현재 통영시 사량면 양지리, 당포唐浦는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개도介島는 통영시 산양면 추도이다.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본다. 이순신장군은 2일 아침 일본 수군이 당포선창에서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 출동하였다. 당포 앞바다에 이르니 일본군 300여 명이 반은 성안으로 들어가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병력은 성 밖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사격을 하고 있었다. 일본병선은 21척이 두 선창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으며, 큰 배 위에 층루(層樓)를 세우고 그 위에 적장이 서서 지휘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측에서는 돌격장 이기남(李奇男)이 지휘하는 거북선을 돌진시켜 일본군의 층루가 있는 배를 쳐부수었다. 이때 조선병선 여러 척이 달려 나오면서 총과 화살을 쏘고, 중위장인 순천부사 권준權俊은 적함선 안으로 뚫고 들어가 적장을 쏘아 맞혔다. 이어서 척후장의 군관이자 흥양보인興陽保人인 진무성陣武晟이 그 적장의 머리를 베어내자, 일본군은 사기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군은 추격을 하여 적의 병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때 일본의 대함선 20여 척이 다수의 소선을 거느리고 거제도로부터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 바깥 바다로 향하자, 내항하던 일본병선은 방향을 돌려 도망쳤다. 이에 조선수군은 날도 저물어 접전을 단념하고 진주의 창선도昌善島에 머물렀다. 이틀 뒤 당포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거느린 25척의 함선과 합세하여, 5일 일본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唐項浦로 향했다. 23전 전승 중에 당항포는 유일하게 두 번을 싸워 승리를 하신 곳이 된다.

이순신 장군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도 당포해전을 승리로 이끄시니 ‘귀신 잡는 해병의 진원지가 되니 지금도 면면히 이어오는 통영의 정신이 된다.

승승장구하던 왜군이 얼마나 공포에 질렸으면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의 화살처럼 빠르고 험한 물길 위에 땅을 파 길을 만들면서 도망갔을까. 279년 후, 장군의 10세손인 이규석李奎奭이 제198대 통제사로 부임하여 고종 14년(1877년)에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하였다. 이때 호상재湖上齋도 같이 지어 지방민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착량묘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지나면서 비바람에 쇄락 된 채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도 지정 기념물로 지정되고 1985년까지 5차례의 정화사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해 단기 4344년(서기 2011년) 12월 16일.
날은 화창하고 착량묘 위의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푸르렀지만 손끝이 시리도록 맵고 추운 날이었다. 자연히 413년 전의 그날의 추위가 느껴진다. 지금 보다 훨씬 추웠을 당시의 기후에 방한기능이 형편없을 부실한 무명옷, 바다 한가운데 몰아치는 삭풍과 얼음장 같은 물보라는 장졸을 가리지 않았을 터이다. 해군과 통영의 백성들이 올리는 기신제에는 통영에 대를 이어 오는 우리의 가락이 공의 혼백을 기리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장엄하고 구성지게 울려 퍼졌다. 기신제가 끝나자, 떡국을 나누어 먹으면서 남녀노소가 서로를 위로하는 아름다운 전통에 가슴깊이 의義로움과 따사로움이 울려 퍼진다.

떡국은 새해의 소망을 담은 음식이다.

다시 맞이하는 임진년, 새해에는 또 어떤 다사다난한 일들이 대한민국과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일이라도 능히 넘어갈 것이며 능히 발전 할 것이라는 꿈과 희망과 각오를 다져야 한다. 특히 내년은 선량들과 대통령을 뽑는 중차대한 국가대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땅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통영統營의 마음을 온 국민에게 밝고 크게 전달 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과 대통령이 탄생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까치처럼 반가운 소식을 만들어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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