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초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졌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청태종淸太宗 홍타이지(1592~1643)는 과감, 치밀하게 명明과의 건곤일척을 준비하면서 미리 후환의 싹을 자르려고 조선을 침략한 것이 병자호란의 실체이다.

전란戰亂이라는 뜻은 전戰은 외국과의 국가적 전쟁, 란亂은 동족간의 싸움을 칭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은 6.25동란과 같은 동족간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후금은 이미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강제로 조선과 형제兄弟관계를 맺고 돌아간다. 냉엄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고 있던 광해군은 명, 청 사이의 중립외교를 펼치나 그것이 불만이었던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인조반정의 쿠테타를 감행, 성공한다.

▲사) 국학원 원장(대), 한민족 역사문화 공원 원장 원암 장영주
새로 들어선 조정은 광해군과는 정반대로 ‘친명반청親明反淸의 정책을 쓴다. 그러나 그간 더욱 강력해진 청은 오히려 조선에게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한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조상 '몽거티무르'는 조선에 귀부한 적이 있었고 서울에 두 차례 와서(1395, 1404)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알현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다. 불과 200여 년 만에 상하가 뒤바뀐 것이다.

이제 명明과 청淸을 동시에 두 임금이자 두 아버지로 섬겨야 하는 기막힌 처지가 된 조선왕조는 나름대로 결전을 준비한다. 그러자 이미 몽골도 손에 넣은 청은 세계 최강의 20만 명의 팔기군과 홍의포紅衣砲를 앞세워 열흘 만에 서울에 도달한다. 화살 같은 진격 속도이다. 놀랄 새도 없던 인조는 강화도로 향하던 몽진 가마를 급히 남한산성으로 돌린다. 가마꾼들도 다 도망가니 인조께서는 서흔남徐欣男이란 농부의 등에 업혀 산성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만 3천명의 군사, 한 달 분의 식량과 모진 추위 밖에 없었다. 어느 곳 하나 희망이 없이 포위를 당 한 채 두 달을 저항을 한다. 말이 저항이지 실은 항복의 명분을 찾는 두 달이었다.

조선의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명明의 임진왜란의 조선의 파병으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明)가 늙고 병들었다고 자식(朝鮮)이 효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 일(조선의 存亡)은 그 다음 일이다.” 하면서 화석화된 소중화의 명분에 사로 잡혀있었다. 동족일 수 있는 청淸은 줄곧 ’오랑캐‘라고 경멸하는 반면, 타민족인 명明에게는 철저하게 의지하면서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일관한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칼날 위의 현실 앞에 눈을 감았으니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은 울음소리와 피 자욱이 낭자한 참극의 땅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 인조께서는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이마가 터지도록 절을 하고 눈밭에 꿇어 앉아 항복을 청한다.

결국 1)청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길 것, 2)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을 것, 3)조선의 왕자, 신하의 자손을 인질로 보낼 것, 4)청 태종의 생일 등의 경사에 사절을 보낼 것, 5)청이 군대를 요청하면 즉시 보낼 것, 6)성을 쌓거나 수리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내고 청은 물러간다. 동시에 50만~60만 명의 부녀자와 화살 받이 남자들이 청과 몽골로 끌려갔고 몇 년 뒤 모진 고생 끝에 목숨을 걸고 탈출하거나 속량된 조선 여인들은 목을 매거나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다. 조선의 여인과 백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은 백번을 돌아봐도 조선의 고관대작들을 비롯한 남자들에게 있음이 아닌가. 고려는 세계 최강의 몽골에 대하여 40여 년간 항쟁을 했고, 임진왜란은 7년간의 싸움 끝에 결국 왜군을 격퇴하였지만 병자호란은 불과 단 두 달 만에 조선의 임금이 직접 항복을 한다. 전례가 없는 패전국이 된 것이다. 오히려 승전국 청淸의 12명의 황제와 황족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니,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이다.

병자호란은 조선 조정의 밖으로는 거듭되는 외교적 실책과 안으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은 실정과 군사력 약화의 대표적인 내우외환內憂外患이었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 착오로 불러들인 정권 실세들의 부패와 무능에 기인한다. 결코 되풀이 될 수 없는 인재人災요 더 할 수 없는 비극이다. 임진왜란은 ‘이비이비’(耳鼻耳鼻, 애비애비, 귀와 코 베어 간다.)라는 말을, 병자호란은 환향녀(還鄕女 화냥년)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 조심스럽게 북벌을 추진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명에서 청으로 교체된 사대事大가 100년 전 까지 지속되더니 결국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게 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1598년 12월 16일(당년 음력, 11월 19일)추운 남해 관음포觀音浦 앞바다에서 순국하시니 생명과 맞바꾸어 나라를 지켜내신지 불과 40년이 안되어 조선은 어찌 호란의 비극을 또다시 불러들였는가! 또, 어찌 이토록 지금의 우리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현실과 꼭 닮았는지 모골이 송연하다. 정녕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인가.

이순신 장군의 순국 다음 해 1599년, 통영 백성들에 의하여 조선 땅에서 제일 먼저 장군을 기리는 착량묘鑿粱廟가 건립되고 현재까지도 통영 충렬사(박형균 이사장)의 주도로 매년 12월 16일 택하여 기신제忌辰祭를 올림으로써 정성을 다하여 그 숭고한 뜻을 기린다.

장군께서 순국하신지 304년 뒤인 1902년 12월 16일 유관순 열사가 이 땅에서 태어나고 나라를 위한 짧은 생을 마치니, 이 또한 거두고 내는 하늘의 뜻이다.

상해의 홍구 공원에서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벌인 윤봉길 의사(1908 ~1932) 또한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신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中에서 -

경북 영해면에는 도해단蹈海蹈海이 있다. 경북 영양 출신의 벽산 김도현 碧山 金道鉉 의병장께서 '도해(蹈海)‘함으로써 순국하신다. 그는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부친의 장례를 모신 뒤 추운 바다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시니 1914년 12월 23일, 그의 나이 64세이다.

‘오백년 말에 태어나 붉은 피 온 간장에 엉키었는데 중년의 19년 동안 머리카락만 늙어 가을서리 내린 듯하네. 나라가 망함에 눈물은 하염없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 또한 아파라. -략-희디 흰 저 천리 길 물속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김도현의 절명시-

1910년 12월 24일 안동 땅의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1914년)이 66세의 노구와 식솔을 이끌고 단군의 개국지인 서간도를 향하니 영영 고향과 조국을 떠난다. 식민지 땅 에서는 하루를 살기도, 죽기도, 묻히기도, 자손이 태어남도 거부한 것이다. 김대락은 안동의 ‘내앞마을’ 의성김씨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금부도사를 지냈고 사람 천석, 글 천석, 쌀 천석의 ‘삼천석 댁’ 으로 불리 운 명가이다. 그의 막내 여동생 또한 ‘대한의 어머니’라 칭해 마땅한 김락(金洛 1862~1929, 의병장 향산 이만도의 맏며느리)으로 예안의 3.1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결국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초를 겪다가 사망한다.

한편, 고향을 떠난 60여 명의 백하의 남녀노소 식솔들은 서울을 거쳐 이듬해 4월 19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하니 무서운 간도 땅의 북풍한설을 뚫고 나온 장장 4개월여에 걸친 유랑이다. 그 천신만고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을까. 먼저 도착한 사동의 황씨 문중과 매부인 안동의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의 가문과 합류한다. 이후 이동영, 이회영 등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신흥 무관학교의 전신)’를 열어 수많은 광복군 동량들을 길러 낸다.

12월에 우리는 사상최초로 무역 1조 달러의 시대를 열었고 한 해의 끝자락에서 바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내 생명의 바닥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위에 열거된 일들은 지금, 한민족으로 태어나 여기, 지구에 온 이유를 바로 알고 세계를 경영할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뼈와 피에 새겨진 12월의 ‘나의 생명 기록’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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