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국학원 원장(대), 한민족역사문화 공원 원장 원암 장영주
지난 10월 21일에 홍암 나철선생의 95주기 추모제가 그의 고향인 보성군 벌교읍에서 열렸다. 보성군민과 보훈가족 및 독립운동가의 후손, 경향 각지에서 모인 국학운동 회원들 등등 뜻있는 분들이 대거 모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추모의 뜻이 날이 갈수록 널리 퍼지니 이는 벌교의 자생단체인 홍암나철선양사업위원회 양현수 위원장을 비롯하여, 나훈, 전상우님과 같은 가슴 뜨거운 군민들의 열정적인 활동에서 비롯된다.

홍암 나철선생(1863~1916)은 개화주의자인 왕석보와 김윤식에게 신학문을 배우고, 조선 말 과거에 급제하시니 전라도에서는 ‘나급제’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백봉도사를 만나 한민족의 경전인 ‘삼일신고’라는 비서(秘書)를 전해받고, 독립운동을 더욱 치열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하였다. 홍암 나철선생은 청산리전투 승리의 주역인 북로군정서 등 당시 항일독립군 및 독립운동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상징이었다. 조선말의 독립운동은 외교, 의열, 전쟁, 정신문화운동, 마지막으로 자결순국이라는 여러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홍암 나철선생은 이 모든 방법을 순차적으로 다 동원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셨으니 가히 독립운동의 화신이요 아버지라 칭할 수 있다.

사)국학원은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아버지’로서 나철 대종사의 뜻을 이어, 천안 국학원의 ‘한민족역사문화공원’내에 동상을 건립하였고 독립기념관에 어록비를 세워 교육함으로서 그 정신을 널리 알리고 있다.

가수 조영남씨는 나철 선생의 일대기를 써서 한국어, 일본어판으로 출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영남씨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근세사회에 나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나철은 단군을 옹호하다가 꽤 성공하고 일제의 종교 탄압을 못 견뎌 자살하니 이런 사람을 모른 척하는게 참 이상하다. 이게 책을 쓰게 된 동기의 하나.’ 라는 소회를 전한다.

일제침략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구로다 중장의 강압적인 조약 체결 후, 20년 간 일본은 조선 합병을 위하여 호시탐탐, 온갖 작태를 부리는 중,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 그 승리를 뒤에 업고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경술국치로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다.

나철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은 외교운동으로부터 시작되니 러·일 강화회의가 진행 중인 포츠머스 군항으로 가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이 시도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자, 오기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천황에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같이 과감한 외교활동은 보통 사람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을사오적의 망동을 배후로 더욱 조선을 옥 재워 온다. 마침내 덕수궁을 포위하고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국새를 빼앗아 찍음으로써 을사조약을 체결한다. 외교적 독립운동이 효과가 없자 나철은 을사오적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새로운 자주적 정부를 조직하려했다. 1907년 서울, 나철 선생은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결사대원 18명을 규합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할 의열 계획을 세운다.

“여러 의사들이여! 여러 의사들이여! 오늘의 일은 대한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길이요, 우리 2천만 국민의 생사에 관한 문제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바라건대 결사적인 의지로 이 5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쓸어버리면 우리는 물론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살 수 있으나, 그 성패가 오늘에 달렸으면…” 그러나 기일이 촉박하고 대원들의 연습 부족으로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선생은 ‘단군교의 중광(重光)’을 천명하고 대종교의 교세를 국외로 확대하여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도록 이끌어간다. 일제는 대종교를 불온 단체로 낙인찍어 모질게 탄압하였고 선생은 스스로 숨을 멈추는 선도(仙道) 최고의 경지인 폐식법(廢息法)으로 목숨을 거두심으로써 일제에 맞섰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대한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등, 국내외에서 맹렬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 1918년의 대한 독립선언, 1919년에는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에 불이 붙어 세계로 전파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초를 닦은 신규식, 백포 서일과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장군 등, 빛나는 청산리 대첩의 개가를 올린 민족의 별들도 모두 선생의 충실한 신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선생의 모든 활동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과업은 700년간 외세와 정치적 이유, 우리자신의 무관심으로 땅 속 깊이 묻혔던 단군정신을 불러내어 단단하게 이음으로써 우리에게 국혼부활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준 것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쓰신 신비롭고도 절절한 예언시가 있다.

조계칠칠(鳥鷄七七)  일락동천(日落東天)  흑랑홍원(黑狼紅猿)
분방남북(分邦南北)  낭도원교(狼道猿敎)  멸토파국(滅土破國) 적청양양(赤靑兩陽)  분탕세계(焚蕩世界)  천산백양(天山白陽) 욱일승천(旭一昇天)  식음적청(食飮赤靑)  홍익이화(弘益理化)

조계(을유 1945년)년, 음력 7월 7일(양력 8월 15일) 일본은 동쪽 하늘에 떨어지고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양분하니, 그들의 사상과 종교가 국토와 나라를 망치고. 북쪽 국가, 동쪽의 나라가 세계를 분탕칠치지만, 천산의 하얀 나라(백의민족)가 강성해져 북쪽 나라와 동쪽 나라를 합병하고 마침내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건설한다.”

선각자 홍암 나철 선생은 목숨으로 예언을 하셨으니, 후손인 우리들은 ‘한민족의 새로운 탄생과 지구경영’을 쉼 없이 이루어 내자. 단군의 홍익인간 철학으로 대한민국이 세계정신 문명의 중심국이 되어야만 선생의 예언은 비로소 완벽하게 실현 될 것이다. 국학원은 단, 47일 만에 단기 병용 100만 서명을 이루었고 열화와 같은 호응으로 다시 천만 서명으로 확대되고 있다. 삼일신고의 가르치심처럼 스스로 깨어나서 자신의 뇌 안에 신의 씨가 이미 내려 와 있음을 발견하자. “자성구자하라, 강재이뇌(自性求子 降在爾腦)시니라.” 이것이 바로 국민이 신이 되는 증좌이다.

이 어찌 신명나지 않을손가. 배달의 자손이여, 천손 한민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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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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